* 일하지 않는 사람도 먹고 살자
ㅡ 프레시안
지난 6월 5일 스위스의 기본 소득 국민투표 결과는 '부결'이었습니다. 투표에 참여한 사람들 중에서 23.1%만이 기본 소득 개념을 스위스 헌법에 도입하는데 찬성했습니다. 그런데 기본 소득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전혀 위축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한 번만에 기본 소득이 스위스에 도입될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스위스는 직접민주주의의 나라입니다. 시민들 10만 명이 서명을 하면 온갖 사안을 국민투표에 붙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번에 통과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국민투표는 즉각적인 통과를 기대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사회적 의제를 공론화하기 위해 하는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스위스의 기본 소득 국민투표는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위스 국민투표 이후에 세계 여러 나라에서 기본 소득 운동은 힘을 얻고 있습니다. 영국의 경우에는 녹색당만이 기본 소득을 당론으로 채택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노동당까지 기본 소득을 정책으로 검토한다고 합니다.
대한민국만 하더라도 여러 언론에서 기본 소득을 다루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7월 7일~9일까지는 서울에서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대회가 열립니다. 전 세계의 기본 소득 운동 동향을 파악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외국의 기본 소득 운동가들도 많이 참석을 할 예정입니다.
(☞관련 기사 : 제16차 기본 소득 지구네트워크 대회 프로그램)
앞으로 기본 소득은 전세계적으로 더 확산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기본 소득은 불평등이 심화되고 일자리가 줄어들며 생태위기가 심각해지는 현재의 상황을 풀 수 있는 유력한 대안이기 때문입니다.
'비노동소득'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이자
그러나 한국에서는 여전히 기본 소득에 대한 거부감이 존재합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기본 소득이 비(非)노동소득이라는 것이 큰 이유입니다. 기본 소득은 노동을 하든 하지 않든 간에 보장되는 소득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비노동소득으로서의 기본 소득에 대해서는 연령대별로 느끼는 차이가 큽니다. 스위스든 다른 나라에서든 젊은 층은 기본 소득에 대해 찬성하는 비율이 높은 편입니다. 그 이유는 일자리가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는 층이기 때문입니다. 일자리가 줄어들면서 '일자리 구해서 먹고 살아라'가 아닌 다른 대안이 필요하다는 것은 분명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많을수록, 그리고 본인이 힘들게 일하고 있다고 생각할수록 기본 소득에 대한 거부감이 큽니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일수록 기본 소득을 받아들이기 힘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사회를 바라보십시오. 지금의 사회에서 비노동소득을 얻고 있는 사람들이 없습니까? 부동산을 많이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부동산임대료라는 형식으로 막대한 비노동소득(노동의 대가가 아닌 소득)을 얻고 있습니다. 내가 열심히 일해서 부동산을 샀는데, 뭐가 문제냐? 라고 얘기할 수도 있지만, 지금 한국의 높은 부동산 가격은 노동의 대가가 아닌, 거품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높은 부동산 임대료가 온전히 부동산 소유자의 몫으로 정당화하기는 어렵습니다.
주식이나 금융자산을 많이 갖고 있는 사람들도 비노동소득을 많이 벌어들이고 있습니다.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경우에는 주식 배당으로만 1년에 2000억 원 이상을 벌어들이고 있습니다. 이것이 온전히 이건희 회장의 노력의 대가라고 볼 수 있을까요? 정경유착과 부정부패, 그리고 투기와 특혜의 몫이 분명히 그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사회의 최상위층에 있는 사람들은 100% 정당화할 수 없는 비노동소득을 많이 받고 있는데, 정말 소득이 필요한 사람들은 '기본 소득'이라는 비노동소득을 받으면 안 되는 이유가 있을까요? 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기본 소득은 우리 사회의 공유자산에서 발생하는 이익을 사회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돌아가게 하자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서울 강남에 있는 비싼 부동산이 온전히 그 소유주의 노동으로 이룬 것은 아닙니다. 지금의 강남이 있기 위해서 국가적으로 예산을 들여 인프라를 구축했고, 교통과 환경을 개선했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강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강남에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만 '비노동소득'을 누릴 권리가 있을까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토지, 천연자원, 물, 바람, 공기와 같은 자연적 공유재뿐만 아니라 인터넷, 금융시스템 등 사회공동의 노력에 의해 만들어진 인위적 공유재들이 많습니다. 고소득자 개인이 벌어들이는 소득도 온전히 자신이 '잘난 덕분'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사회공동체가 있고, 과거로부터 축적된 지식과 정보가 있는 덕분에 '잘난 개인'도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본 소득은 시혜가 아니라 '자신의 몫'을 받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최소한의 삶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비노동소득을 보장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기본 소득과 최저임금은 서로 보완하는 관계
최근 국회 앞에서 최저임금 1만 원을 요구하는 단식 농성이 있었습니다. 최저임금을 올리는 것과 기본 소득을 보장하는 것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서로 보완하고 지지하는 관계에 있습니다.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제임스 미드(James Meade)'같은 경제학자는 일찍부터 '일자리가 줄어들수록 비노동소득이 보장되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불평등이 심화될 것'이라고 예측한 바 있습니다. 일자리가 줄어들면 노동자들은 협상력이 약화되고 더욱 불리한 처지에 놓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본 소득이 보장될 필요가 있습니다.
기본 소득이 보장되면, 노동자들은 임금 외의 안정된 소득원을 갖게 되고, 부당한 노동조건에 대해서는 싸울 수 있는 '비빌 언덕'이 생기게 됩니다. 파업을 하면 무노동-무임금 원칙이 적용되면서 생존의 위협에 몰리게 되는 비정규ㆍ저임금 노동자들에게 비노동소득은 실질적으로 노동3권을 행사할 수 있는 버팀목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설명을 해도, 여전히 기본소득에 대해 회의적인 분이 있다면, 미국 노동운동의 핵심인물이었던 앤디 스텀의 얘기를 들어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앤디 스턴(Andy Stern)은 200만 명의 조합원이 있는 미국의 전미서비스노조(Service Employees International Union, SEIU)의 지도자였습니다. 전미서비스노조는 미국에서 최저임금 인상운동을 가장 강력하게 펼치고 있는 노동조합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최저임금 1만 원과 유사하게 '최저임금 15달러' 운동을 펼치고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앤디 스턴은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노동운동가로 꼽히던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그는 2010년에 한계를 느끼고 은퇴를 했습니다. 미국도 노동조합 조직률이 낮아지고 있는 추세입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미국의 노동조합은 민간 부문 미국 노동자 3명 중 1명을 대표하던 조직에서 16명 중 1명을 대표하는 조직으로 변했다고 합니다. 그런 그가 최근에 책을 냈습니다. 책 제목이 <마룻바닥 높이기(어떻게 기본소득이 우리 경제를 갱신시키고 아메리칸 드림을 다시 세울 수 있는가?) Raising the Floor : How a Universal Basic Income Can Renew Our Economy and Rebuild thr American Dream>라고 합니다.
아직 그의 책을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그가 최근 'the Atlantic'과 인터뷰를 한 내용을 찾아 보았습니다. (☞관련 기사 : The Case for Unions to Support a Universal Basic Income) 그는 노동 중심 경제(work-centric economy)에 대한 숭배에서 벗어날 것을 주장합니다. 그는 미국적 전통에서도 기본 소득의 뿌리를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미국 독립에 큰 영향을 끼친 사상가인 '토머스 페인'이 토지를 상속할 때 상속세를 걷어 기본 소득을 지급하자는 제안을 했던 것에 주목합니다. '노동에 관계없이 돈을 지급하자'는 생각은 미국에서도 오랜 뿌리를 가진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아울러 앤디 스턴은 노동조합이 방어적 자세에서 벗어나 미래를 바라보고 기본 소득에 대한 관심을 가질 것도 제안합니다. 더 이상 임금노동 중심으로 생각해서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앤디 스턴의 주장은 한국에도 시사하는 것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노동자들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평생을 바친 노동운동가가 기본 소득을 대안으로 생각하게 된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일어나고 있는 최저임금 1만 원 운동과 기본 소득 운동은 사실 한 묶음의 운동인 것입니다.
노동소득도 제대로 받고(최저임금 1만 원), 비노동소득을 보장하여 사람들의 삶에 숨통을 틔우는 것이 필요합니다. 스위스 국민투표를 계기로 전세계적으로 불고 있는 기본소득 열풍에 대해 한국에서도 더 많은 관심이 일어나기를 기대합니다.